이안 매큐언과 맥그리거의 <입체기하학>
이언 매큐언 원작의 TV영화 <입체기하학>

영국작가 이언 매큐언(혹은 이안 맥완)의 글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현대인이라는 동물들의 끝없는 강박과 광기에 대한 조롱 섞인 통찰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랑의 신드롬>을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인 조는 교외 벌판에서 우연히 제드 패리라는 청년을 만난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당신의 눈빛에서 사랑을 발견했다”며 조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치명적인 애착이 불러일으킨 동성애적 광증? 어림도 없다. 제드 패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을 위한 집착이다. 제드는 자동 응답기에 수십 통의 메시지를 남기고, 조를 미행하기 시작하며, 심지어 살인을 청부하기까지 한다. 이언 매큐언은 결국 집착이라는 인간의 뒤틀린 본성이 거의 종교적인 광신으로까지 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산하게 말한다.

이언 매큐언은 괴물 같은 작가다. 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 개개인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공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다른 대표작 <시멘트 정원>의 주인공은 부모가 죽은 뒤 시멘트 정원이 있는 저택에 남겨진 네 명의 남매들이다. 세상에 나오길 원치 않는 이 아이들은 근친상간적 욕망과 동물적인 야심으로 창조된 끔찍하도록 슬픈 피조물들이다. <암스테르담>은 또 어떻고. 맥큐언은 주인공 중 한 명의 변태적인 포르노 사진을 중심으로 무너지는 남자 친구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휘몰아간다. 남자라는 동물들의 썩어빠진 질투와 경쟁을 낄낄거리는 듯한 어투로 조롱해대는 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오싹해질 지경이다.
이언 매큐언의 악몽 같은 세계를 여러 번 거닌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그의 작품들이 거대한 스크린에 투영되는 날을 꽤나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품들의 면면을 떠올려보노라면 독자들의 영화적 욕망이 갑자기 현실화되는 사건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터. 맥큐언의 소설을 장편영화로 만들 만한 용기를 가진 감독이라면 폴 버호벤 정도가 유일하지만 이 도발적인 네덜란드 영감은 할리우드에서 쫓겨나 고향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다. 하지만 맥큐언 팬들의 애석함을 달래줄 괴작이 하나 존재한다. 이완 맥그리거와 그의 삼촌인 다니엘 로슨 감독이 2002년에 제작하고 ‘채널4’를 통해 방영한 30분짜리 단편영화 <입체기하학(Solid Geometry)>이 바로 그 유일무이한 괴작이다.

단편소설집 <첫사랑, 마지막 의식(First Love Last Rites)>의 한 작품을 영화화한 <입체기하학>은 TV에서 방영된 것이 놀라울 정도로 기묘한 예술품이다. 필(이완 맥그리거)과 메이지(루스 밀러)는 스코틀랜드의 도시 에딘버러에 사는 커플이다. 필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새롭게 편집하는 것을 조건으로 유산 2만5,000파운드를 상속받을 수 있다는 편지를 받는다. 증조할아버지의 일기에는 다른 차원으로 통할 수 있는 불가해한 기하학 도형의 설계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기장을 편집하던 필은 거의 광적으로 기하학 도형을 완성하는 데 집착하기 시작하고, 설명할 수 없는 집착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마저 갈가리 찢어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종이를 이용해 연꽃 모양의 기하학 도형을 완성시킨 필은 그것을 아내인 메이지에게 실험해본다. 실험은 성공했는가? <입체기하학>은 아무런 해답도 없다. 시청자들은 <환상특급>의 잘 만들어진 단편이 남길 만한 스산하고 괴이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브라운관 밖으로 내던져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이언 매큐언이 원했음직한 반응이 아닐까. 미묘함을 더욱 돋우는 것은 광기에 싸인 젊은 여피 역을 (옷도 훌렁훌렁 벗어던지며) 세상에서 가장 잘해낼 유일한 배우인 이완 맥그리거의 섬세한 연기다. 30분의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그의 매력은 조각 같은 두 엉덩이처럼 빛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2002년 우연히 채널을 돌리던 중 <입체기하학>을 최초로 시청하는 행운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은 몇몇 관객들 역시 <사랑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으로 상영한 이 놀라운 단편을 발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간혹 희귀하게 발견되는 DVD를 구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관람의 통로다. 애석하게도 몇 년 전까지 DVD를 판매하던 영화의 홈페이지(http://www.solidgeometry.net)는 현재 문을 닫아버렸고, 사이트 주소를 아무리 다시 쳐봐도 순결한 백색의 화면만이 반복될 뿐이다. 혹시 <입체기하학>의 홈페이지 운영자는 마침내 홈페이지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일까. 그렇다면야, 이건 정말 인터넷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홈페이지의 퇴장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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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mon | 2013/11/18 21:03 | 영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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