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싱어를 서울에서 만났을 때 물었다. "당신은 트레키 아닌가요. <스타트렉> 극장판도 먼저 만들고 싶어한 걸로 알고있는데요". 싱어는 말했다. "네. 전 <스타트렉>의 열렬한 팬이에요. 하지만 J.J 에이브람스라면 좋은 <스타트렉>을 만들거에요. 저도 꼭 보러갈겁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면서 잠깐 생각했다. 만약 브라이언 싱어가 <스타트렉>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엑스맨>을 스크린에 살려낸 솜씨로 USS 엔터프라이즈호를 지휘했다면 우아한 우주 서사시가 나왔을거다. 갑자기 J.J 에이브람스에게 지휘권을 건네준 파라마운트가 야속해졌다. 물론 에이브람스도 좋은 감독이다. 하지만 그는 브라이언 싱어같은 트레키가 아니란 말이다(그는 오히려 <스타워즈> 시리즈의 오타쿠다). 지난 40여년동안 팬심으로 빚어진 우주를 이 떡밥의 제왕이 망치기라도 한다면 어쩔것인가.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었다. J.J 에이브람스가 되살려낸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역대 최고의 <스타트렉> 영화다. 물론 지난 10편의 <스타트렉> 영화들을 그닥 즐기지 못했던 관객이라면 그게 무슨 대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낫겠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오리지널 <스타워즈> 시리즈 이후 가장 흥미진진한 스페이스 오페라다(비견할만한 영화는 조스 웨든의 <세레니티> 정도가 전부다). 물론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트레키가 아닌 관객도 숨을 죽이며 즐길만한 여름용 블록버스터다. 재미있는 건 J.J 에이브람스의 역할이다. 그가 맹렬한 트레키가 아니라는 사실은 오히려 시리즈를 재부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에이브람스는 시리즈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배반했다. 혹은 배반함으로써 끌어안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알려진대로 시리즈의 프리퀄이다. 66년도 오리지널 시리즈의 영웅들, 커크 선장과 스폭을 중심으로 한 7인조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는 소리다. 우주를 항해하던 USS 엔터프라이즈호 앞에 정체불명의 함선이 공격해온다. 죽은 함장을 대신해 엔터프라이즈호를 지휘하던 커크는 자살 공격으로 800명의 선원과 자신의 아내, 갓 태어난 아들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의 목숨을 구한다. 한편, 불칸 행성의 소년 스팍은‘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불칸족의 본성과 감정적인 지구인의 핏줄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로부터 십수년 후. 반항아로 자라난 커크와 스폭(재커리 퀸토)은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성격이 판이한 둘은 사사건건 부딪힐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로뮬란 행성의 악당 네로(에릭 바나)가 불칸 행성과 지구를 궤멸하러 다가오자 둘은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어떻게든 파멸의 위기에 맞서야 한다.
주인공의 미션이 지구 구출이라면 J.J 에이브람스의 미션은 좀 더 복잡하다. 그는 팬들에게 익숙한 캐릭터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창조하는 동시에 1억4천만달러짜리 블록버스터다운 스펙터클을 주조해야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과 오래된 시리즈의 아우라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에이브람스와 제작진이 가장 먼저 성공한 부분은 캐스팅이다. 두 젊은 배우 크리스 파인과 재커리 퀸토는 윌리엄 샤트너와 레너드 니모이의 명성에 짓눌리는 일 없이 세기적인 아이콘들을 새롭게 해석해낸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인 로베르토 오씨와 알렉스 커츠먼이 오리지널 시리즈에 흐르던 커크와 스폭의 우정과 경쟁심이 뒤섞인 미묘한 관계를 멋지게 부각시킨 덕이다. 커크와 스폭에 못지않은 명성을 지닌 조연 캐릭터들이 뒷 전으로 밀려나는 일도 전혀 없다. 칼 어번의 맥코이, 조 살다나의 우후라, 존 조의 술루, 사이먼 페그의 스코티, 그리고 안톤 옐친의 체코프는 기억에 남을만한 시퀀스들을 적어도 하나씩은 부여받는다.

기술적으로도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ILM 디지털 스펙터클의 최고조라고 할 만 하다. 네로가 대기권에 세워놓은 거대한 드릴을 제거하기 위해 커크와 술루가 맨몸으로 낙하하는 ‘스페이스 점프’ 장면은 속도감과 특수효과의 완성도, 액션의 짜임새가 거의 무협의 경지다(J.J 에이브람스의 전작인 <미션 임파서블 3>의 상하이 빌딩 액션을 떠올려보시라). 그러나 우주를 배경으로 특수효과를 펼치는 건 생각만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타이타닉>처럼 하이퍼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일이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작업을 요구한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이 최근의 SF영화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건 J.J 에이브람스가 ‘우주’라는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프리퀄들처럼 번드르르한 기술적 완성도를 뽐내는데만 연연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종종 카메라를 멀찍이 빼버린 뒤 관객이 우주의 적막함과 거대함을 지긋이 쳐다볼 수 있도록 만든다. 특히 첫번째 우주 전투 시퀀스에서 에이브람스는 점처럼 조그만 우주선들이 모선으로부터 탈출하는 장면을 광활한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 위에서 거의 시적일 정도로 느긋하게 비춘다. 그 장면에서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래 우주란 그런 것이다. 대기가 없는 우주는 소리를 전달하지 않는다. 오직 고요 뿐이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브라이언 드 팔마가 <미션 투 마스>에서 그랬던 것 처럼)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디지털 스펙터클과 아름답게 조화시킬 줄 아는 드문 스페이스 교향곡이다.
그런데 캐릭터를 새롭게 되살리고 블록버스터다운 스펙터클을 창조하는 것 만으로 이 늙은 시리즈를 재부팅하는 건 불가능한 미션이다. 생각해보라. <스타트렉> 시리즈는 40여년이 넘는 역사의 무게에 스스로의 발을 걸고 쓰러져가는 형국이었다. TV 시리즈는 예전만한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배틀스타 갈락티카>는 새로운 <스타트렉>의 자리를 완전히 도둑질했다),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의 출연진들이 참여한 지난 몇년간의 극장판은 쓰라릴 정도로 재미가 없어졌다. 사실상 <스타트렉>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에는 여전히 수백만명의 트레키들이 존재하지만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역사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J.J 에이브람스와 작가들은 영리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들은 트레키가 아니다. 죽은 우주에 대한 시체애호증적인 팬심은 없다. 그들은 아예 시리즈를 새로 시작해버렸다.

여기서 비밀을 밝혀야만 할 듯 하다(여기서부터 약한 스포일러가 있다. 스포일러에 민감한 관객이라면 피하는 게 낫다. 하지만 알고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스타트렉>에 완전히 무지한 관객이라면 미리 알고 가는게 나을 수도 있다). 사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프리퀄이 아니다. 물론이다. 이 영화는 젊은 커크와 스폭의 첫 만남을 다룬다. 하지만 이 영화속 커크와 스폭은 지난 <스타트렉> 시리즈의 커크와 스폭이 아니다. 에이브람스가 시리즈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배반했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간결한 플롯으로 완성된 고전적인 <스타트렉> 영화지만 시나리오에 거대한 트위스트가 하나 존재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오랜팬들은 예상했겠지만, 커크의 아버지는 커크의 탄생을 보지못하고 죽어서는 안된다. 소년 커크는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순조롭게 함장의 자리에 올라야만 한다. 그게 바로 정규 <스타트렉>의 역사다. 그러나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커크의 아버지는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악당 네로에 의해 죽는다. 그로부터 예전 <스타트렉>의 우주는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대가 시작된다. 게다가 레너드 니모이가 직접 연기하는 오리지널 스폭 역시 네로와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온다. 그는 젊은 커크와 스폭을 직접 만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평행우주속의 또다른 <스타트렉>이다.
오랜팬들, 특히 맹렬한 트레키들이라면 이 어안이 벙벙한 비틀기에 몸서리를 칠 지도 모를 일이다. . 하지만 J.J 에이브람스의 선택은 완벽하다. 그가 단순히 시리즈의 프리퀄을 만들었다면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스타트렉> 영화들은 오리지널 시리즈의 그림자속에서 발버둥을 쳐야만 했을 것이다. 크리스 파인과 재커리 퀸토를 비롯한 젊은 배우들은 단순히 선배들의 연기를 캐리커쳐하는데 힘을 쏟아야만 했을 것이다. J.J 에이브람스는 <스타트렉 더 비기닝>을 오리지널과 전혀 다른, 혹은 어긋난 평행우주속 이야기로 재창조함으로써 육중한 유산의 짐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극장판의 역사를 정말로 새롭게 써나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야속해 할 필요 없다. J.J 에이브람스는 역사를 뒤집어 엎으며 눈이 휘둥그레질 속도로 질주하는 만화경 스펙터클을 창조했지만, 40여년에 걸쳐 USS 엔터프라이즈호와 항해를 지속해 온 팬들을 내치지도 않았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는 트레키들만이 알아채고 즐거워 할 미묘하고도 세부적인 즐거움들이 끝없이 숨어있다. 시리즈의 창조자 진 로젠베리가 품었던 휴머니즘의 우주적 전파를 믿는 낙관주의자들의 개척정신 또한 오롯하다. 오랜 팬들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팬들을 위해, J.J 에이브람스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마침내 제리 골드스미스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틀어젖힌다. 우수에 젖은 듯 장중하고도 가슴이 벅차도록 경쾌한 그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오래된 시리즈의 프롤로그가 새롭게 시작된다. 우주. 마지막 개척지(Space... the final frontier). J.J 에이브람스는 죽은 우주를 닫고 새 우주를 열어젖혔다. 빅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