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라이징
한니발 렉터는 어떤 유년기를 거쳐 육식동물로 성장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양반께서 클라리스에게 우회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폭력과 관계된 유년시절의 정신적 장애를 찾아야 해. 빌리는 살인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학대의 세월을 통해 살인마로 만들어진거야. 클라리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대답에 대한 영화적 각주로서의 프리퀄이자, 악마의 유년기 트라우마를 분석하려는 뒤늦은 프로파일링입니다.

때는 2차 대전이 한창인 리투아니아. 부모를 잃은 소년 한니발과 여동생 미셸은 오두막에 숨어있던 중 도주하던 독일군 패잔병에게 발각됩니다 한겨울의 오두막에 갇혀버린 패잔군들은 기아에 시달리다가 결국 한니발의 여동생을 맛나게 잡아먹고, 살아남은 한니발은 삼촌이 살고있는 프랑스로 탈출합니다. 불행히도 삼촌은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렸지만, 대신 아름다운 일본인 숙모 ‘레이디 무라사키’가 한니발을 거둬들이지요. 무라사키에게서 사무라이 법도와 검술(농담이 아닙니다)을 익히며 의대에 진학해 해부학적 지식을 쌓아거던 한니발은 여동생을 소화시킨 위장의 장본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수를 감행하는데요, 기묘한 미식 욕구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거죠.

뜬금없지요? 혹은 토마스 해리스가 돈에 눈이 멀었거나요. 현재의 한니발 렉터와 연결시키기에는 뜬금없는 내용에서도 짐작이 가듯이,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배트맨 비긴즈>가 아니라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제로>에 가까운 영홥니다. 새로운 탄생 설화를 통해 스스로를 또다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슈퍼 히어로들과는 다릅니다. 괴물이 된 과정이 까발려진 괴물은 더이상 괴물이 아니라 멜로 드라마의 악당에 불과하니까요. 사무라이 여인과 2차 대전의 카니발리즘으로 인한 꽃미남 한니발의 유년기 트라우마가 구구절절 이어질수록, 안소니 홉킨스가 창조한 한니발의 아우라는 급진적으로 옅어집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한니발 라이징>이 처절하게 재미없는 B급 스릴러는 또 아니라는 사실입니다(네 맞아요. 이 사실이 더 불행하죠).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피터 웨버 감독은 강박적으로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조율할 줄 아는 꽤 괜찮은 감독이고요, 프로덕션 밸류는 대단히 고급스럽고도 우아합니다. 토마스 해리스와 뻥쟁이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의 물욕 덕택에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 영화가 한니발의 프리퀄이 아니라 <갈고리를 든 소년>이라는 제목의 오리지널 스릴러였다면 한니발 렉터의 팬과 피터 웨버에게 공히 득되는 게임이었을겁니다.


다만 공리의 열혈팬들이라면 뭐든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헤이안 시대의 고전 <겐지 이야기>로부터 이름을 빌어온 -무려 히로시마에서 가족을 잃은 사무라이 일족- 무라사키의 존재는 작가의 일본 문화에 대한 멍청하고 단편적인 심취를 보여주는 이물입니다. 하지만 공리의 결연한 아름다움은 삼키기 힘든 이물감을 소년 한니발의 몽정기적 환상으로 근사하게 변환시키고 말지요. 말도 안되는 캐릭터지만 눈이 멀도록 아름다우니 어쩔도리 없습니다. 가스페르 울리에는. 뭐 (한니발 렉터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럭저럭 예쁘긴 한데 아무래도 얘 목소리만 더빙인것 같더군요.
by Damon | 2007/02/27 00:32 | 트랙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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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니야 at 2007/02/27 09:15
식인 꽃소년을 보러갈까 하였더니 어쩐지 망설여지지만...인육을 즐기는 미청년의 로망을 버릴 수가 없어서;;;
Commented by dolkongkn at 2007/02/27 11:40
참 보는 동안 무안해 죽는줄 알았습니다. 트래일러는 그닥 나쁘지 않았고 주워읽은 무료 신문에서는 일절의 평가 없이 감독이랑 줄거리만 살짝 보여준지라 남친의 거부반응을 무시하고 보러갔습니다. 공리가 검술을 가르치는 장면은 그야 말로 너무 진부했고 그 함부로 못건드린다는 귀한 검들이 경찰이 왔을때 떡하니 거실에 있는건 또 왠일이요(장식품이었나) 뜬금없는 히로시마 신파에다 라스트 키스씬에서는 정말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Commented by Damon at 2007/02/28 00:14
니야/ 그래도 안소니 홉킨스와 가스퍼 울리에의 간극은. 어흑. 좀 힘들답니다.

dolkongkn/ 이야기 자체가 말도 안되니(돈독 오른 토마스 해리스!) 영화를 공들여 찍어도 한니발 프리퀄은 끝없이 아스트랄로 달려가지요.
Commented by ki겡 at 2007/02/28 01:22
한니발에서 줄리안무어와 홉킨스는 키스를 안했어야 했어요
그때부터 모든게 엉망입니다 =.=
Commented at 2007/02/28 09: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amon at 2007/03/01 04:50
ki겡/ 제말이 그말입니다. <한니발>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지만, 키스라니. 정말 너무해요.

비공개/ 잘 갔다오셨다니 제가 다 배가 부릅니다. :-)
Commented by zzaal at 2007/03/05 00:21
'나이가 들어도 멋있는'이 아닌, '나이가 들면서 멋있는' 배우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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